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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1-16 03:00:00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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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기획]美서 이공계 박사 학위 한국인 60% “미국에 남겠다”

국가경쟁력 위협하는 ‘두뇌 유출’


“야후(Yahoo)는 두뇌 유출(Brain Drain) 중.”

한때 실리콘밸리를 호령하던 야후가 2012년 머리사 메이어 최고경영자(CEO)를 영입한 뒤에도 실적 부진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조만간 대량 감원 카드를 꺼내들 것으로 보이자 미국 뉴욕타임스(NYT)는 “야후의 우수 인력이 떠나고 있다”며 이같이 보도했다.

미국 내 기업조사업체들에 따르면 야후 직원 가운데 ‘회사가 좋아질 것’이라고 믿는 비율은 34%에 불과했다. 잘나가는 대표 기업 구글(77%)뿐만 아니라 비슷한 경영난을 겪고 있는 트위터(61%)보다도 크게 낮다. NYT는 “회사 장래에 대한 신뢰가 낮은 것이 문제”라고 분석했다.

두뇌 유출은 비단 민간 기업에만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천재 1명이 1만, 10만 명을 벌어 먹이는 시대에 국가도 우수 인재가 많아야 변화와 혁신을 통한 성장을 거듭할 수 있다. 한국은 주요 선진국은 물론이고 칠레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터키 멕시코 페루처럼 경제 수준이 낮은 나라보다도 두뇌 유출 문제가 심각한 나라라는 지적을 받는다.

최근 발표된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원(IMD)의 ‘2015 세계 인재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두뇌 유출 지수(고급 및 기술 인력의 국외 유출이 국가 경제 경쟁력에 미치는 영향 평가)는 61개국 중 44위. 61개국 중 18번째로 두뇌 유출이 심각한 나라라는 뜻이다. 전년에도 60개국 중 46위로 하위권이었다.



이공계 전문 인력의 해외 유출 특히 심각

특히 이공계 전공 인력의 해외 유출은 심각하다. 첨단 과학기술 분야를 포함한 이공계를 뜻하는 ‘스템(STEM·과학 기술 공학 수학)’ 전공자는 미국에서 공부한 뒤 한국 기업(연구소 포함)과 미국 기업을 놓고 고민하다가 결국 미국 잔류를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2012년 한 조사 결과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이공계 고급 인력 1400명 가운데 60%가량이 “한국에 안 돌아가고 미국에 남고 싶다”고 희망했다.

왜 그럴까. 서울대 토목공학과 출신인 김영수 노스캐롤라이나주립대 토목공학과 석좌교수(제44대 재미한인과학기술자협회 회장)는 “한국에는 전문성과 기술성을 유지할 수 있는 연구 환경이 부족하다”고 말했다. 이어 “한국 정부가 집중해서 육성하는 정보기술(IT)이나 생명과학 분야를 제외한 다른 과학기술 분야는 특히 지원 구조나 연구 환경이 더욱 열악하다”고 지적했다.

고려대 물리학과 출신인 서은숙 메릴랜드대 물리학과 교수도 “한국의 획일적이고 개성을 존중하지 않는 문화가 과학자들과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 남과 다르게, 남들이 하지 않는 분야를 연구해야 과학적 혁신이 이뤄지는데 한국에서는 이에 대한 관용이 부족하다는 설명이다. 서 교수는 “괴짜를 키워주지 않는 사회적 문화에서 빌 게이츠나 스티브 잡스 같은 인재들이 나오기 어렵다”고 아쉬워했다.

세계 특허 조사회사인 WIPS 글로벌의 백종근 미국법인 대표는 1998년 한국 특허청 산하 특허정보원에 입사해서 2009년 미국 지사장으로 나왔다가 눌러앉은 경우. 그는 “같은 일을 해도 미국 시장에서 (한국보다) 더 높은 보수를 받는다”며 “예를 들어 특허 조사 한 건의 수임료가 한국에서 100만∼150만 원이라면 미국에서는 1만 달러(약 1200만 원) 이상을 받는다”고 말했다. 경제 규모 측면에서 미국에 크게 못 미치는 한국이 고급 인력을 유치하려면 ‘특별한 대우’를 해야 하는 구조다.

‘노 리턴(No Return)’ 현상은 미국 이외 지역에선 더 심각하다. 재일교포 3세인 홍정국 전 도쿄대 특임교수(전 IBM리서치 도쿄기초연구소 원장)는 “일본에 온 한국인 유학생 중에서 매년 150∼160명의 이공계 박사가 배출되는데 3분의 2 정도인 100여 명이 일본에 남는다는 통계가 있다”고 말했다. 가장 큰 이유는 ‘한국의 미국 박사 선호 경향’이 지나쳐 일본 박사가 한국에 돌아가 원하는 자리를 잡기가 더 힘들기 때문이다.



자녀 교육 문제로 눌러앉는 경우도 많아


자녀 교육 문제는 힘들게 해외에서 공부를 마친 우수 인력이 고국으로 돌아올 수 없게 만든다. 본인은 돌아가고 싶지만 입시경쟁 중심의 한국 교육에 자녀를 맡기기 어려운 환경을 걱정해 눌러앉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IMD에 따르면 한국의 초중고교 교사 1인당 학생 수는 16.6∼18.4명으로, 61개국 중 46∼48위 수준의 하위권이다. 공교롭게도 두뇌 유출 순위(44위)와 비슷하다.

서울대 기계설계학과 출신인 김범준 도쿄대 생산기술연구소 교수는 “아이들에게 한국의 입시 지옥, 주입식 교육을 시키고 싶지 않아 하는 박사들이 주변에 적지 않다”고 말했다. 미국의 글로벌 IT 회사에 근무하는 한 공학 박사(50)는 “학위를 받은 뒤 미국 기업에 근무하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홀로 되신 어머니를 모시려고 몇 년 전 귀국해 한국 대기업에 다닌 적이 있다. 하지만 1년 반 만에 아이들 등쌀에 밀려 다시 미국으로 나왔다”고 말했다. 중고교생 자녀들이 살벌한 한국 교육 환경을 견뎌내지 못했다.

해외인재 영입을 담당한 경험이 있는 삼성그룹의 한 임원은 “한국에서 미국으로 파견된 주재원조차 몇 년 근무하면 자녀 교육 문제 때문에 미국에 주저앉는 경우가 있는데, 여러 해 미국 생활을 한 한국인 박사나 재미교포들은 한국의 교육 여건에 얼마나 신경을 쓰겠느냐”고 말했다.



국가 차원의 종합 대책 필요

주요국들은 국가 경쟁력에 도움이 되는 인재를 확보하기 위해 총력전을 펴고 있다. 파리 테러 충격 때문에 미국이나 유럽에서 난민 수용에 대한 사회적 거부감이 커지고 있지만 이런 분위기가 ‘고급 해외 인력을 눌러 앉히려는 경쟁’을 약화시키진 않는다.

미국의 경우 국가 경쟁력의 토대가 되는 과학 기술 공학 수학, 즉 STEM 전공자에겐 다른 인문사회 계열보다 파격적인 취업 혜택을 준다. 미국 정부는 매년 한국을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의 전문직 인력의 신청을 받아 추첨으로 8만5000개의 H-1B 취업 비자를 내주고 있는데 이 혜택의 주된 수혜자는 이공계 인력이다.

뉴욕시립대(CUNY)의 시티칼리지 카를로스 메르카도 학장은 “우수한 능력을 가진 STEM 전공자가 좋은 일자리를 잡기에 미국보다 좋은 나라는 없다고 생각한다”며 “STEM 분야 우수 두뇌 확보 문제에선 정부 학교 기업 간에 견고한 연합 전선을 형성하고 있다”고 말했다.

개인의 능력을 높이 사는 문화도 우수 인력 유치에 한몫한다. 대형 금융회사 JP모건의 애플리케이션 개발자인 문국상 선임연구원(44·컴퓨터과학 박사)은 “특히 미국 회사들은 한국처럼 학벌이나 나이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개개인의 능력과 역량만 보는 풍토가 강하기 때문에 STEM 전공자들은 취업이 훨씬 더 수월한 것 같다”고 말했다.

꼭 미국처럼 잘사는 나라를 예로 들지 않아도 된다. 김영수 교수는 “내 주위의 많은 중국인 과학자들 중 우수한 인재들이 중국으로 돌아갔거나 그럴 예정이다. 중국이 경제대국이지만 한국보다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높은 나라는 아니지 않느냐. 그래도 돌아가는 건 국가와 사회가 적극 지원을 해주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장기적 안목의 인재 유치 절실


“해외에 있는 한국인이나 한국계 우수 인재를 영입하는 최후의 수단이 뭔지 아세요. 모국에 대한 봉사와 헌신, 결국 ‘애국심’에 호소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삼성, LG, 현대·기아자동차 등 한국의 글로벌 기업 인사 담당자들의 말이다. 연봉이나 삶의 질, 자녀 교육 여건 등 모든 면에서 미국 유럽 일본 등 선진국보다 상대적으로 뒤질 수밖에 없는 한국으로 해외 인재를 데려오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얘기다. “우수 두뇌가 이것저것 ‘머리’로 계산하기 시작하면 한국행을 설득할 수 없기 때문에 ‘가슴’에 불을 지르는 감성적 접근을 하게 된다”고 한 대기업의 인사 담당 임원은 설명했다.

당장 급한 사람만 찾는 ‘빨리빨리’ 분위기와 단기 성과주의 역시 극복해야 할 난제다. 홍정국 전 교수는 “한국인 연구자 중에는 젊었을 때 일본에서 어느 정도 성과를 내고 난 다음 한국에 돌아가고 싶다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젊은 박사만 찾고 ‘당장 와 달라’고 요청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한국 기업의 수요와 고급 두뇌의 공급 간에 ‘시간차’가 존재한다는 얘기다.

그는 “한국 정부나 기업들이 해외 우수 인력을 꾸준히 접촉하면서 ‘5년 후든, 10년 후든 와 달라. 기다리겠다’고 하면 해외에서 연구 성과를 낸 뒤 한국에 돌아가 ‘애국’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서은숙 교수도 “연구자에게 신속한 성과를 요구하는 한국의 빨리빨리 문화가 개선돼야 한다”며 “단기에 수익을 내는 분야와 장기적으로 성과를 이룰 분야를 잘 배합하는 전략적 투자를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뉴욕=부형권 bookum90@donga.com  /  도쿄=장원재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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